chapter 76 - <토지>에 묘사되는 식민지 과도기 풍경 글 쓰는 마음

요즘 식민지 시기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고 있는데, 비록 픽션이지만 <토지>에서 묘사된 당시 풍경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당시 풍경을 가장 잘 묘사한 건 역시 당대에 창작된 작품들이지만, <토지>는 작가가 직접 그 시절을 경험해 묘사가 생생하기도 하고 워낙 긴 세월을 다루기 때문에 그 변화상이 자못 흥미진진하다.

토지가 다루는 시기는 1897년에서 1945년까지. 이 시기 등장인물들을 둘러싼 환경의 변모를 보면 정말 상전벽해란 말이 딱 어울린다.

우선 구천이와 별당아씨. 양반댁 마님이 하인과 야반도주했다는 것만 해도 충격적인데 실은 이들이 아버지가 다른 형수와 시동생 사이라는 더 큰 충격을 안겨주는 사건으로 서막을 연다. 구한말인데 벌써 설정이 심상치 않다. 요즘 드라마에서도 다루기 힘든 소위 막장이라니...

하인과 야반도주한 어머니를 원망하고 증오한 서희였건만 재기를 위해 옮겨간 신흥 개척지 용정에서 역시 사랑을 택해 하인인 길상과 결혼한다. 사방천지에서 사람이 몰려들어 열린 지역이었던 용정에서의 서희의 선택은 그러나 이미 별당아씨 사건만큼의 충격을 주지 못한다.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그뿐, 오히려 결혼을 결사 반대하던 서희의 스승 김훈장은 철저하게 무시당한다. 그런데 서희의 결단에도 한계는 있어서, 가문을 잇기 위해 아이들에게 가문의 성을 물려주고 자기 성을 바꾼다. 신분제의 과도기를 여실히 보여주는 선택이다.

양반인 이상현은 기생인 기화와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만주로 도피하지만, 그 딸인 양현은 기생의 딸이라는 신분에도 서희에게 거두어져 여의전을 나와 의사가 된다. 이미 교육기관은 학생의 신분을 따지지 않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학생의 신분에 대한 반발은 학부모들에 의해 사적으로 일어난다. 백정의 손자인 영광은 진주라는 소도시에서는 도저히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결국 익명이 보장되는 대도시 부산으로 가 학업을 이어가지만, 연애를 하는 바람에 퇴학당하고 여학생 부모로부터 온갖 모욕을 당한 끝에 도일해 방황하다가 색소폰 연주자가 된다. 작곡 능력도 꽤 출중하고 연주 실력은 일급이라는 묘사로 보아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학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흥미와 소질에 따른 선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비록 주변의 시선은 딴따라라고 무시하고 본인도 자신의 직업을 떳떳하게 생각지는 않지만. 실제로 양현이 영광에게 공연을 보러가고 싶다고 하자 만약 공연에 나타나면 다시는 색소폰을 불지 않겠다고 말하는 장면도 있다. 그럼에도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겪었던 수모와는 이미 거리가 먼 세상이 왔다. 지금으로 따지면 탑급 연예인인 셈으로, 사모하는 팬들까지 제법 있을 정도로 변모하는 신분제 사회를 제대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기생의 딸인 양현과 백정의 손자인 영광은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사랑에 빠지지만, 여자에 비해 보잘것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자각한 영광이 역시 만주로 떠나면서 이루어지지 못한다. 뭐 다른 복잡한 사연이 작용하기도 했고. 오늘날까지도 해소되지 않고 있는 남자가 여자보다 잘나야 한다는 인식에 따른 결말인 셈이다.

평사리에 계속 살았다면 살인자의 처인 어머니 임이네에 대한 굴레에 갇혀 제대로 된 인생을 살지 못했을 용이의 아들 홍이는, 간도에 갔다 와 진주에 정착하며 자연히 신분세탁 비슷한 과정을 거치게 되고 당시로서는 신흥직업인 화물차 기사를 거쳐 다시 만주로 돌아가 사업가로 변신한다. 심지어 임이네의 전적을 알고 있는 김훈장의 딸이 과거에 개의치 않고 인물 하나만 보고 홍이를 사위로 선택하기까지 한다. 김훈장이 서희의 결혼을 반대하다 간도에서 쓸쓸히 사망한 것에 비하면 천지개벽 수준인 셈이다. 이미 양반끼리 결혼하는 세상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집안에 흠이 좀 있어도 본인만 반듯하면 문제삼지 않는 세상이 와 버렸다. 뭐 김훈장 집안이 몰락한 양반이라는 것도 이유긴 하지만. 즉 아직까지는 과도기라는 말이다. 홍이의 아버지 용이가 무당 딸인 월선과 맺어지지 못해 얼마나 피맺힌 인생을 살았던가 떠올려 본다면 그래도 대단한 변모다.

역시 살인자인 김평산의 아들 한복은 평사리에 정착해 갖은 수모를 겪고 결국 떠돌이 거지였던 여자와 결혼하지만, 사적인 수모에 불과할뿐 자식들은 고등교육도 받고 외지로 옮겨가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고 떳떳하게 살아간다. 한복의 아들 영호는 아내 숙이와 최참판댁 아들 윤국의 사이를 의심하며 열등감을 느끼지만 어쩐지 신분에 대한 열등감이라기보다는 재력에 대한 열등감으로 보인다. 최참판댁이라는 이름이 이미 지주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어차피 김평산도 몰락한 양반 출신이긴 하지만 살인자라는 굴레가 더 큰 바람에 신분이 아무 의미가 없는 집안이기도 하다.

양반이 변모한 대표적인 인물은 조병수다. 장애인으로 태어나 부모에게 버림받은 조병수는 악전고투 끝에 소목장인이 된다. 양반 생활을 경험한 적 없는 조병수의 자식들은 부모가 양반이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무런 신분에 대한 자각 없이 평범하게 살아간다. 한복의 아들 영호의 내력을 알면서도 거리낌없이 교류하기까지 한다.

중인 출신 역관의 딸인 명희는 조선 왕족 출신으로 일본 작위를 받은 집안 조용하와 결혼한다. 집안의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조용하는 결혼을 관철시키고 집안에서는 철저한 무시로 일관한다고 나온다. 양반도 모자라 왕족 출신 고관대작이 중인 출신과 결혼하기에 이른 것이다. 명희의 결혼은 파탄을 맞지만 이건 다른 이유때문에...

워낙 등장인물이 많아 이것 말고도 더 있지만 기억나는대로 당시의 과도기적 풍경을 몇 가지 적어봤다. 전체 5부작인 <토지>는 각 부가 평균 10년 정도의 기간을 다룬다. 워낙 격변기라 각 부의 풍경이 전혀 다르다. 1부와 2부가, 2부와 3부가 전혀 딴판이고, 근대 문물이 자리잡은 3부부터 격세감이 좀 적어진다. 이 엄청난 격변이 채 50년도 되지 않는 세월동안 벌어진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다.

계속 강조했듯이, 작품 내 등장인물들의 시대인식, 선입견, 사고방식 등등이 각 시기에 걸맞게 제대로 묘사된다. 저 시기에 저런 말도 안되는 사고방식을? 갸우뚱하게 만드는 장면이 없다. 작가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집필했는지 알 수 있지.

이런 과도기와 천지가 뒤집히는 한국전쟁을 거쳐 현대사회가 완성된 것이다. 전근대에서 근대를 거쳐 현대까지, 정말 정신없다. 동 시대를 다룬 서양문학과 비교하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비록 학술서적은 아니니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특히나 후반부는 작가 자신이 겪은 식민지 시절의 생생한 증언이기도 하니 당시 사회상이 궁금하면 읽어봐도 좋을 것이다. 물론 작품 자체가 명불허전 걸작이지만.

덧글

  • 아이다호 2019/08/13 21:45 # 답글

    토지 완독 하셨군요. 저도 완독은 했는데 기억나는 장면이 없었는데 님의 글을 읽어보니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좋았습니다.^^
  • 마담보바리 2019/08/14 00:04 #

    저도 읽은지 오래 돼서 몇 개나 기억나려나 싶었는데 적다 보니 떠오르더군요. 다시 한 번 들춰봐야겠다 싶어졌습니다. 정말 재밌게 읽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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