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0 - 최근 본, 창작에 큰 자극이 되어 준 영화 세 편 글 쓰는 마음

좀 지나긴 했지만 연달아서 영화 세 편을 보았다.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이렇게 한꺼번에 공개되는 것도 참 오랜만인 거 같다. 세 편 모두 뛰어난 작품이었지만 특히 시나리오가 뛰어났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좋은 자극을 받았다.

<텔마와 루이스>
세상에 나온지 26년 정도 밖에 안 됐지만 나오자마자 일찌감치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페미니즘 영화의 대명사와도 같은 작품이지만 시나리오 작가가 언급했듯이 여성에 국한되지 않은, 세상 모든 약자들을 위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다시 한 번 보면서 얼마나 시나리오가 매끄럽게 집필되었는지 새삼 감탄했다. 모든 사건은 대단원에 이르기까지 물 흐르듯 흘러가며, 그 과정에서 두 주인공의 캐릭터가 극적으로 변하는 모습도 입체적으로 묘사되었다. 두 사람 모두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지만 캐릭터의 매력으로 따지면 역시 텔마가 더 돋보인다. 남편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던 평범한 주부에서 극한에 몰린 끝에 능동적으로 거듭나는, 가히 <에일리언>의 리플리에 버금가는 강렬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렇다고 루이스 캐릭터가 매력이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은 두 캐릭터 모두 너무 훌륭해서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이 정도로 입체적인 인물 묘사라니, 게다가 뛰어난 극적 전개하며 강한 주제의식, 아카데미 시나리오 상을 탈 수 밖에 없는 작품이다. 요즘 말로 작감배가 모두 뛰어나면 이런 작품이 튀어나오게 된다.

두 주인공의 입을 빌어 줄곧 주제의식을 말하지만, 워낙 캐릭터에 완전히 녹여 내어 대사를 구사하는 덕에 전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게 바로 극작법의 정수라는 것이다.

인상적인 대사가 수두룩하지만 기억 나는 대로 적어 보자면,

<난 좀 미친 거 같아>
<넌 원래 미쳐 있었어, 텔마. 지금이 그걸 표현할 수 있게 된 유일한 기회일 뿐이지>

<루이스, 깨어 있니?>
<눈을 뜨고 있냐는 뜻이라면, 맞아>
<난 지금, 너무 분명하게 깨어 있어. 지금까지 이렇게 확실하게 깨어 있었던 적이 없었던 거 같아.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여>

(남편이 다정하게 전화 받자 마자 끊으며) <(우리가 경찰에 쫓긴다는 사실을 남편이) 벌써 알고 있어>

(경찰의 추격으로 막다른 절벽에 몰리게 되자) <우리 절대로 잡히지 말자. 계속 달려>
<뭐?>
<계속 달리라고>
<확실한 거지?>
<응>

<그 놈이 죽은 건 하나도 안타깝지 않아. 내가 아니라 네가 그 놈을 죽인 게 아쉬울 뿐이지>

<만약 경찰에게 갔다면 네 말대로 아무도 내 말을 안 믿었을 거고, 아마 난 지금 보다 더 망가졌을 거야. 지금은 차라리 재미있기라도 하잖아?>

이런 식으로 명대사가 줄줄이 나온다. 완전히 명대사의 향연... 아, 또 보고 싶다... 정말 멋진 영화였어...



<토니 에드만>
창작하는 사람의 로망 중 하나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는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다. 예측할 수 있다는 건 기존 작품을 통해 학습한 결과 유추할 수 있는 대로 전개가 흘러간다는 뜻이고, 창작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이것만큼 싫은 일도 없다. 그러나 좋든 싫든, 아무리 머리를 써도 어느 정도는 예측대로 전개해 나갈 수 밖에 없는 게 창작자의 고민이기도 하다.

그런데 단 한 순간도 예측할 수 없는 작품을 드디어 만났다. 정말 어떻게 이런 식으로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지,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이 작품을 보는 동안 예측이란 완전히 무용지물이 된다.

괴짜 아버지와 일중독에 빠진 딸의 얘기라고 한 줄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게, 정말이지 나머지는 직접 보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전개를 과시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단 한 번도 우리가 예측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그럼에도 전부 납득이 간다. 이렇게 말하면 도대체 뭔 소리야? 하겠지만 실제로 그렇다... 이건 뭐 시나리오도 뛰어나지만, 역시나 작감배가 모두 제대로 잘 어우러졌기 때문이지만...

정말 배우들은 모든 걸 버린 연기를 보여준다. 머리로 납득 가지 않는 장면이 한 두 장면이 아니었을 텐데, 감독을 믿고 따르며 훌륭한 연기를 펼친다. 이것도 보고 나와서 든 생각이지 보는 동안에는 어떻게 해, 어떻게 해,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보게 된다.

멋도 모르고(아니면 적어도 남자는 알면서도 데리고 왔을지도) 소위 말하는 평범한 예술 영화인 줄 알고 보러 온 연인이 있었는데(대화 내용으로 유추해 보건대), 두 사람이 어디까지 진도가 나간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연인끼리 보기엔 상당히 민망한 장면이 한 장면 있었다... 저 두 사람이 영화를 보고 저 장면을 한 번 따라해 보자고 하지는 않을까 심히 궁금해지던... 한국도 진짜 많이 개방되었구나 좀 놀랐다. 저런 장면이 삭제되지 않고 그대로 나올 줄이야...

본 사람들한테 힌트 주자면, 그 웃긴 장면 아니에요... 케이크가 나오는 그 장면이에요...

뭐 아무튼 진짜 가장 많이 자극 받은 작품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을까? 좀 더 나를 벗어 던져야 가능하겠구나, 깨달음을 얻은...



<문라이트>
작년에 공개된 뒤 상이란 상은 차곡차곡 긁어 모으고 있는 화제의 작품이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아카데미 시상식 해프닝도 있었지만 그건 사실 뭐 별로 관심 없었고... 아무튼 기대를 안고 보러 갔다.

역시나 뛰어난 시나리오를 자랑하는 작품이다. 전혀 전형적이지 않은 인물들에, 그 인물들이 처한 아이러니한 상황에, 가슴 아픈 인물들의 선택에... 뛰어난 시나리오를 배신하지 않는 뛰어난 연출과 연기까지, 가히 작년 공개된 작품 중 최고작 중의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후안이라는 캐릭터. 연기도 연기지만 캐릭터 자체도 뛰어나다. 어린 샤이론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면서도 샤이론의 어머니에게 마약을 파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괴로워 하는 모습이 가슴 아팠다. 후안은 샤이론의 인생에 있어 빛이었을까 어둠이었을까? 이런 질문이 가능한, 굉장히 다층적인 작품이다.

샤이론을 사랑하면서도 마약 중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샤이론의 어머니도 가슴 아프고, 서로의 마음을 교환하고 난 바로 그 다음날 샤이론을 폭행해야 했던 케빈의 그 치기어린 선택까지... 그러나 흑인 저소득층에 만연한 치부를 보여주려는 작품이 아니어서 좋았다. 이들이 겪는 고통과 아이러니는 그 어떤 곳에서도 일맥상통하는 그런 것들이다.

세상에, 두 무뚝뚝한 남자가 이런 성적 긴장감을 보여줄 수 있다니... 이전 포스팅에서 <유령 작가>에 등장했던 성적 긴장감 묘사에 감탄한 적도 있었지만 이 작품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움에서 질투를 거쳐 서로의 감정 확인까지, 절제된 대사와 표정만으로 그 모든 감정을 연기한 두 배우를 정말 격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감정의 흐름을 이끌어내는 바바라 루이스의 명곡 <Hello, stranger> 선곡까지... 덕분에 주구장창 유튜브로 이 장면을 반복 재생하고 있다...

거친 세상 묘사를 이렇게 뛰어난 방식으로 해내는 영화들을 보면, 거들먹거리며 폭력의 세계를 묘사하며 간지를 부여하는 영화들에 역겨움을 느끼게 된다. 거친 세상을 살아내는 인물의 고통과 아이러니에 좀 주목해 보라는 말을 해 주고 싶다. 바로 그런 게 명작과 삼류 작품의 차이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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