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5 - <시인의 사랑> 글 쓰는 마음

본지 좀 됐지만 아직도 잔상이 남았다. 시나리오가 좋다는 칭찬이 자자하기에 보러 갔더니 과연, 감독의 내공이 보였다. 열연한 배우들의 연기도 한몫 했고.

제목은 진짜 지나칠 정도로 흔해터지고 진부하지만, 내용은 절대로 진부하지 않다. 전개 방식이 매번 예측을 빗나간다는 점에서는 <토니 에르드만>을 연상케도 한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우연히 만난 청년에게서 시의 영감을 얻은 어느 시인의 흔들리는 감정을 묘사한 영화라고 해야겠지만, 이런 류의 원조격이라 할 <베니스의 죽음>처럼 흘러가지는 않는다.

시인이 청년에게 욕구를 느끼기는 하는데, 연민과 뒤섞여 나중에는 종잡을 수 없어진다. 그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을 간파했으니 청년은 거칠게 <시발, 내가 불쌍해요?>라고 물었을 테고. 뭐 이런저런 투샷이 꽤 잡히긴 하는데 두 사람이 연애를 하는 건지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건지도 불분명하다. 하지만 시인의 청년을 향한 욕구는 초반에 작정하고 꽤나 직접적인 화법으로 묘사된다. 그러니까 욕구가 있었던 건 확실한데, 그걸 욕구로 풀어나가기엔 연민이 더 앞서는 청년의 현실에 가로막혔다고 해야 하려나. 그때문에 가로막힌 것 같지도 않고... 꽤나 모호하면서도 다층적으로 해석되기에 흥미롭다.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시인이 집을 나가는 장면이다. 아내에게 차분하게 화를 내는 시인의 대사가 참으로 인상적이다. 스스로도 납득이 안가는, 온통 종잡을 수 없어져서 더 혼란스러운 감정을 훼손당했다고 하기엔 아내는 이 관계의 당사자이자 희생자니까 적절한 표현은 아니고, 표면적으로는 둘 사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3자에게 퍼뜨린 것에 대한 분노라고 해야 하겠는데 이것도 어찌 보면 적반하장으로 보이고, 그러나 시인의 대사에 공감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나로서는 최고의 장면이었다.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 했지만 결국 뜻대로 되지 않는 스스로의 감정에 대한 분노와 자괴감, 그걸 몰라 주는 아내에 대한 분노와 원망, 그래서 결국 감정이 폭발하고 마는 그 복잡한 심리를 대사와 연기가 어우러져 백미를 이룬다. 그 복잡한 심리를 몰라주고, 도저히 알아줄 수 없는 감정이긴 하지만, 그냥 둘이 계속 연애하면서 나랑 같이 살자고 애원하는 아내의 처절함도 완벽하게 합이 맞고. 그럼에도 집을 나서는 시인이 청년과 살러 나가는 게 아니라는 점도 참 미묘하고. 그런데 또 여자 문제냐는 어머니의 물음에는 그렇다고 하고. 딱히 다른 사람의 눈이 무서워서 청년에게 가지 않은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참 미묘하다.

이걸 과연 불륜이라 해야 할지, 정신적인 간통이 더 용서받지 못할 간통이라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영화에 묘사된 한에서는 그 어떤 혐의도 없다. 그런데도 괴로워하고 상처받고 하니 불륜은 맞겠지. 사랑하기에 떠나 보낸다는 클리셰 넘치는 장면이 있는 데도 워낙 서투른 두 사람이라 미워 보이지가 않는다.

워낙 다층적인 묘사를 하는 영화라 어떻게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작품이다.

굉장히 좋은 작품이란 뜻이다. 어떻게도 해석할 수 있는.

chapter 54 - 책이라는 존재 글 쓰는 마음

한동안, 아마존 킨들이 압도하고 있는 현실을 보며 이대로 책이란 존재는 사라지는 건가 울적했었다. 뭐 내가 책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든, 실은 잡생각에 가까운 단상이었겠지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언젠가는 책을 내야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책을 내놓을 플랫폼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책의 미래에 대해 이런저런 검색을 해 보다가, 내가 책의 물리적 존재에 집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글을 써서 세상에 내놓을 수만 있다면 종이책이든 이북이든 무슨 상관인가? 중요한 건, 책이란 단어가 존재하기도 전부터, 파피루스나 점토판 시절부터 변하지 않는 중요한 사실은, 바로 책이라는 존재의 본질인 내용이다.

어떤 형태로든 그 내용을 채울 자신이 없을 때에만 비관할 것. 어떤 형태로든 글을 써서 세상에 내놓을 수 있으니까.

아마도 나는 그 어떤 내용을 창작해내는 작가, 저자로서의 정체성이 흐트러지는 것을 내심 두려워하고 아쉬워 했나 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작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두려움. 보다 솔직해지자면 내가 쓴 책의 저작 수익이라는 열매를 생전에 따먹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건 물욕과는 좀 다른... 건가? 아니겠지. 결국 글 써서 돈 벌고 싶단 얘기다.

세르반테스가 당대에 전 유럽에 문명을 떨치긴 했지만 본인은 거의 돈을 만지지 못했다는, 몇 백년 묵은 에피소드를 보고 안타까워서 든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그 인생 자체가 너무나 극적인 세르반테스에게 감응한 것이려나... 사실 그렇게 온 인생이 고난으로 가득하기도 어려운 일인데.

이북은 누구나 글을 써서 돈을 만질 수 있는 세상을 열어줬다. 아마존의, 까놓고 말하자면 에로티카, 즉 야설을 이북으로만 판매하는 작가들은 진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다. 영어를 쓰는 지역 그 어느 곳에서나, 뭐 주로 미국이지만, 자기 삶을 꾸리면서 틈틈이 자기 판타지를 써서 돈을 버는 일반인들이다. 어디선가 우스갯소리로 본 바에 의하면, 에로티카 시장의 작가는 대부분 스트레이트 여성이라고 한다. 이성애든 동성애든 양성애든, 남성 작가를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한다 ㅎㅎㅎ. 여자들이 남자들한테 티를 안내서 그렇지 야한 썰을 풀어내는 데엔 확실히 일가견이 있잖아? 우리나라 로맨스 시장도 엇비슷한 거 같긴 하다.

뭐 내가 에로티카 내지는 장르 소설을 쓰겠다는 건 아니지만, 이를테면 여성 작가들이 휩쓰는 바닥에서 남성 작가로서 뭘 어찌 해야 좋을지 몰라 막막한 심정이 엉뚱하게 책이란 존재에 대한 사색으로 이어진 것 같기도 하다.

이런저런 답답함과 우울함이, 본질은 책에 담긴 내용이라는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한 진리를 다시 한번 되새기자마자 단번에 사라지고 말았으니, 천생 나는 그 내용을 채워 넣어야 하는 글쟁이인가 보다...

한편으로는 책의 내용을 중요시하고 물리적 형태에는 집착하지 말아야겠다는, 즉 이제 책을 좀 덜 사들여야겠다는 발상의 전환도 시도하고 싶어졌지만... 아직까지는 책장을 채우고 있는 책이 나는 참 좋다...

chapter 53 - 미치코 가쿠타니 퇴직하다 글 쓰는 마음

며칠 지난 뉴스긴 하지만, 뉴욕 타임즈 도서 부문 수석 기자인 미치코 가쿠타니가 퇴직했다. 우리나라와는 시스템이 좀 다른 모양으로, 구조 조정에 따른 명예퇴직이나 권고사직 비스무리한 것인데 또 정확히 일치하는 개념도 아닌, 뭐 그런 식의 퇴직이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영어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평가가 마침내 그 자리를 떠나며 한 시대를 마감했다는 게 중요하다.

가쿠타니의 이름을 처음 들은 건, 우리나라에선 대부분 그랬듯이 <섹스 앤 더 시티> 에피소드에서였다. 당시엔 유명한 일본계 비평가가 뉴욕 타임즈에 있나 보군, 흘려 들었었는데 그 뒤로 누군가 올려놓은 <섹스 앤 더 시티> 음성본을 시나리오와 대조해 들으며 영어 리스닝 공부나 할까 하고 시작했다가 다시 이름을 접하고 호기심에 드디어 검색을 시작해서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접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어느 작가가 <그녀의 서평을 읽는 것은 마취 없이 생간을 도려내는 기분이다>라고 비유할 정도로 가쿠타니의 비평은 신랄하기로 유명(내지는 악명)했다고 한다. 그 어떤 저명하고 문학적 성취가 뛰어난 작가도 신작이 나올 때마다 그녀의 신랄한 비평을 피할 수 없었다. 아니 방법이 있긴 했지, 좋은 작품을 쓰는 거. 칭찬할 땐 또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니까.

해당 작가가 지금까지 어떤 작품을 써 왔는지는 전혀 상관없이, 지금 리뷰하는 한 권의 작품에만 집중해서 이 작품이 뛰어난지 아니면 형편없는지를 그야말로 메스로 생살을 도려내듯 가차없이, 그러나 수긍할 수밖에 없는 명석함으로 분석하는 그녀의 무자비하고 철저하게 객관적인 비평 방식은 적도 수없이 많이 만들어 냈지만, 뛰어난 내용으로 결국은 비평계의 일인자 자리에 올라서게 했다. 퓰리처상도 수상했고.

처음 검색을 시작한 뒤로 심심할 때마다 뉴욕 타임즈 홈피에 들어가서 신랄하기 짝이 없다는 그녀의 서평을 읽어보려고 시도했지만... 워낙 듣도 보도 못한 풍부한 어휘로 써내려가는 그녀의 문장에서 신랄함을 느끼기엔 내 영어 실력이 너무 짧아서...

단 한가지 확인한 건, 진짜 무지막지하게 읽고 비평했다는 거. 말년에는 힘에 부친 건지 아니면 서서히 퇴임을 준비한 건지 담당한 비평 편수가 많이 줄었지만, 옛 기사로 들어가 보면 참 많이도 읽었구나, 감탄하게 된다. 1983년부터 비평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아무튼 그녀의 재직 기간동안 영어권에서 이름을 알렸던 작가라면 그녀의 무자비한 비평을 피할 수 없었겠구나, 싶다.

퇴직할 때까지 출판 기념 파티에도 전혀 나타나지 않았고, 인터뷰도 한 적 없으며, 작가들의 항의에도 단 한번도 응대한 적 없이 그저 우직하게 읽고 비평만 했던, 서평 내용보다도 그 철저한 객관성 유지가 더 무서운 비평가.

우리나라야 언론사 서적 비평가가 해당 분야 판도를 뒤흔들 수 없는 구조지만, 충분히 판도를 바꿔 왔고 숱한 신인 작가들의 경력을 화려하게 시작하게 해 주었으면서도 늘 한 발짝 떨어져 있던 이 전설적인 비평가는, 퇴직 뒤에도 서평 외의 다른 분야에 관한 좀 더 긴 글을 쓰고 싶다고 하니... 다른 분야에선 또 얼마나 무시무시한 비평으로 해당 분야 종사자들을 몸살나게 만들지 참으로 기대된다.

주례사 비평으로 점철된 우리 현실에서 참 부러운 인물이 아닐 수 없다...

chapter 52 - <덩케르크> 글 쓰는 마음

2012년이었던가... <인터스텔라>와 <그래비티>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장르로 개봉해서 여러모로 비교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인터스텔라>도 물론 명작이었지만 <그래비티>가 워낙 압도적인 걸작이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조용히 <그래비티>의 손을 들어줬었다.

이번에 드디어 놀란 감독이 <그래비티>에 맞먹는 걸작을 내놓은 것 같다. 다른 것 다 제거하고, 오로지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절박함에 집중한 작품. 그런데 이게 실화에 바탕을 둔 내용이니... 모골이 송연해짐과 동시에 숙연해지고, 살아남는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위대한 승리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생존에 대한 위대한 찬가가 이렇게 탄생했다. 늘 그렇듯 픽션은 현실을 이기지 못함을 보여주는 놀라운 작품이다.

투항을 권고하는 삐라가 날아 내려오는 아무도 없는 시가지의 첫 장면에서 느닷없이 가해지는 총격으로 시작하여, 달리고 헤엄치고, 발버둥치고, 울부짖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총체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늘 그렇듯, 전사자 xx명 중 한 명으로 집계되고 말 그런 최후를 맞이하는 인간들이 도처에서 쓰러진다. 주인공은 절대 죽지 않아! 하는 빤한 생각마저도 스쳐갈 겨를 없이... 이런 게 바로 전쟁이라는, 전장의 한복판이라는 것이겠지. 내가 그 한복판에 있다 빠져 나온 것처럼 내내 벌벌 떨었다... 정말이지 전쟁이란...

<인셉션>에서 부렸던 시간의 마법을 놀란은 다시 한번 선보인다. 림보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는, 결과적으로 전체적으로 흐른 시간은 더 길어지는, 그 때의 마법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덩케르크 탈출 작전을 다루는 아주 적절한 극작법이었다.

잔교에서의 1주일, 선박에서의 하루, 전투기에서의 1시간...

어떻게든 빠져 나가려 발버둥치는 잔교에서의 1주일은 왜 그렇게 아득하게 길게만 느껴지던지, 구출하러 달려가는 선박의 하루 행적은 왜 그리도 느리게만 느껴지는지... 그리고 공중에서 이들을 엄호해야 할 전투기의 1시간은 급박하지만 왜 이렇게 뜻대로 안 풀리는지... 모든 시간이 안타까움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인셉션>에서 선보였던 시간의 마법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긴장감을 탄생시킨다.

왜 죽어가는 사람 모두를 살리지 못하는가?

철없던 시절에 이런 생각을 하며 안타까움에 몸부림쳤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답이라고 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 납득할만한 대답을 알고 있다.

한 명이라도 더 살리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남는 모습이 바로 우리를 움직이는 거라고.

그런 집념으로 그 많은 민간 선박이 덩케르크 해변을 뒤덮었던 것이리라. 모두 다 구할 순 없지만, 모두 다 잃는 것보단 낫다는 집념으로.

그런 사명감이 있었기에 전투기 조종사는 임무를 마치고 조용히 인적 없는 곳에 불시착하여 적군의 포로가 되는 것을 택했으리라.

내가 쓰는 작품은 인간의 어두운 면모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강하고, 그것도 결국 나만의 색채기에 딱히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역시나 인간의 생존에 대한 위대한 찬가를 마주하게 되면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나와 전혀 다르지만 결국은 인간을 다루는 같은 작업이니까.

<덩케르크>는 그런 작품이다. 살아 돌아왔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라고 조용히 극찬해 주는...

chapter 51 - 동유럽 3개국 예술 기행이랄까... 글 쓰는 마음

체코, 헝가리, 오스트리아 3개국을 다녀왔다.

뭐 남들 다 가는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인 코스를 밟다 온 셈이긴 한데, 그래도 모처럼 마음 편하게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주변 환경과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음미하는 시간을 원없이 즐기다 왔다. 굳이 규정 짓자면 정원 산책 기행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정원이 많은 고도에 갔으니, 게다가 계절도 계절인 만큼 녹음이 우거지고 온갖 꽃이 만발한 정원 한가운데, 때로는 분수 곁에서 때로는 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기만 해도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심지어 호텔 바로 옆에도 작은 공원이 있었다. 나무 몇 그루만 있어도 새들이 모여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정말 실컷 듣고 왔다.

건물이 낮으니 서울과 비슷한 나무들인데도 더 울창하게 느껴졌다. 그러니 거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거리 곳곳에 벤치도 참 많이 있었다. 지나가다가 얼마든지 앉아 쉬었다 가라는 배려. 거리에 머물러 있고 싶어지게 만드는 이유들이었다.

전형적인 코스긴 했지만 박물관을 꽤 즐기는 편이라 중요한 박물관은 꼭 들렀고, 들르는 박물관마다 도록은 꼭 챙기다 보니... 대책없이 두꺼운 책들을 한 권 두 권 사 모은 결과, 무려 열 두 권이나 짊어지고 오게 됐다. 정말 무거워서 돌아가시는 줄... 그나마 이동이 3번뿐이었으니 망정이지...

책이 열 두 권이나 되게 된 이유는 역시나 지름신의 작용이 있었다.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150유로 짜리 타셴사 도감을 무려 15유로, 90 퍼센트 할인해서 판매하고 있는 걸 보고 흥분한 나머지... 두 권이나 샀다. 700페이지 짜리... 믿기지 않는 할인율에 검색까지 해 봤더니 틀림없는 150유로 짜리 책... 이런 기회를 놓친다면 바보가 따로 없겠지...

게다가 가는 곳마다 현지 작가의 원어책을 한 권씩은 사야겠다는 계획까지 세우고 간 바람에... 체코에서는 카를 차펙의 <R. U. R.>을 샀다. 로봇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선보인 그 책. 그리고 헝가리에서는 산도르 마라이의 책 두 권을 샀다. 사실은 카프카의 고향 프라하에서 카프카 책을 사고 싶었지만, 이미 프라하에는 독일어를 쓰는 사람이 살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는지 체코어 판 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빈에서 사려고 시도했지만 <변신>밖에 없어서... 내가 사고 싶었던 건 <성>이었기 때문에 포기했다. 그 밖에 어릴 때 재미있게 읽었던 독일 동화 몇 권을 사고 싶었지만... 이제는 현지인들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된 책일 뿐이었다. 그래서 독일어 서적은 입수 실패...

벼룩시장이나 기념품 가게에서 산 소품들을 제외하고는 정말 책만 사 온 여행인 셈이다. 사실은 더 짊어지고 오지 못한 책이 워낙 많아서 아쉽기만 하다... 하아...

프라하 카프카 기념관에서는 어머니께 보여드리기엔 너무 우울한 내용이라(요절한 카프카도 그렇고 일가족이 전부 나치 수용소에서 희생되었으니...) 건너뛰고 기념품만 샀다. 가장 카프카를 잘 나타낼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둘러보다가, 사진은 전부 너무 어설펐고, 그래서 고른 게 카프카 서명이 담긴 마그넷. 마음에 꼭 드는 기념품이었다.

베네치아 무라노 유리 공예의 자랑인 아쿠아리움, 즉 물고기가 담긴 어항이나 수족관 제품을 꼭 갖고 싶었지만 너무 비싸서 손가락만 빨고 있다가 우연히 빈 벼룩시장에서 하나 발견해서 9유로에 득템했다. 베네치아 제품은 아니었지만 아쿠아리움 자체를 갖고 싶었기 때문에 눈에 띄자마자 집어들었다. 금붕어 여섯 마리가 헤엄치고 있는 한 손에 잡히는 깜찍한 아쿠아리움.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실은 유리 공예로 유명한 프라하에서 뭘 살까 고민하다가 산 문진도 두 개나 있다. 게다가 빈 시내에서 정말 물방울을 떨어뜨려 놓은 것 같은 모양의 문진도 하나 샀고... 내가 암만 책을 좋아하지만 문진만 세 개를 사 오다니... 하아...

쇼핑한 아이템 무게에 치어 지치고, 때로는 일정이 계획대로 안 풀려 또 다시 지치고, 모든 여행이 으레 그렇듯 예측 불허 투성이 여행이었지만, 나름 하고 싶었던 걸 하다 온 여행이라 벌써부터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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