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3 - 미치코 가쿠타니 퇴직하다 글 쓰는 마음

며칠 지난 뉴스긴 하지만, 뉴욕 타임즈 도서 부문 수석 기자인 미치코 가쿠타니가 퇴직했다. 우리나라와는 시스템이 좀 다른 모양으로, 구조 조정에 따른 명예퇴직이나 권고사직 비스무리한 것인데 또 정확히 일치하는 개념도 아닌, 뭐 그런 식의 퇴직이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영어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평가가 마침내 그 자리를 떠나며 한 시대를 마감했다는 게 중요하다.

가쿠타니의 이름을 처음 들은 건, 우리나라에선 대부분 그랬듯이 <섹스 앤 더 시티> 에피소드에서였다. 당시엔 유명한 일본계 비평가가 뉴욕 타임즈에 있나 보군, 흘려 들었었는데 그 뒤로 누군가 올려놓은 <섹스 앤 더 시티> 음성본을 시나리오와 대조해 들으며 영어 리스닝 공부나 할까 하고 시작했다가 다시 이름을 접하고 호기심에 드디어 검색을 시작해서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접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어느 작가가 <그녀의 서평을 읽는 것은 마취 없이 생간을 도려내는 기분이다>라고 비유할 정도로 가쿠타니의 비평은 신랄하기로 유명(내지는 악명)했다고 한다. 그 어떤 저명하고 문학적 성취가 뛰어난 작가도 신작이 나올 때마다 그녀의 신랄한 비평을 피할 수 없었다. 아니 방법이 있긴 했지, 좋은 작품을 쓰는 거. 칭찬할 땐 또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니까.

해당 작가가 지금까지 어떤 작품을 써 왔는지는 전혀 상관없이, 지금 리뷰하는 한 권의 작품에만 집중해서 이 작품이 뛰어난지 아니면 형편없는지를 그야말로 메스로 생살을 도려내듯 가차없이, 그러나 수긍할 수밖에 없는 명석함으로 분석하는 그녀의 무자비하고 철저하게 객관적인 비평 방식은 적도 수없이 많이 만들어 냈지만, 뛰어난 내용으로 결국은 비평계의 일인자 자리에 올라서게 했다. 퓰리처상도 수상했고.

처음 검색을 시작한 뒤로 심심할 때마다 뉴욕 타임즈 홈피에 들어가서 신랄하기 짝이 없다는 그녀의 서평을 읽어보려고 시도했지만... 워낙 듣도 보도 못한 풍부한 어휘로 써내려가는 그녀의 문장에서 신랄함을 느끼기엔 내 영어 실력이 너무 짧아서...

단 한가지 확인한 건, 진짜 무지막지하게 읽고 비평했다는 거. 말년에는 힘에 부친 건지 아니면 서서히 퇴임을 준비한 건지 담당한 비평 편수가 많이 줄었지만, 옛 기사로 들어가 보면 참 많이도 읽었구나, 감탄하게 된다. 1983년부터 비평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아무튼 그녀의 재직 기간동안 영어권에서 이름을 알렸던 작가라면 그녀의 무자비한 비평을 피할 수 없었겠구나, 싶다.

퇴직할 때까지 출판 기념 파티에도 전혀 나타나지 않았고, 인터뷰도 한 적 없으며, 작가들의 항의에도 단 한번도 응대한 적 없이 그저 우직하게 읽고 비평만 했던, 서평 내용보다도 그 철저한 객관성 유지가 더 무서운 비평가.

우리나라야 언론사 서적 비평가가 해당 분야 판도를 뒤흔들 수 없는 구조지만, 충분히 판도를 바꿔 왔고 숱한 신인 작가들의 경력을 화려하게 시작하게 해 주었으면서도 늘 한 발짝 떨어져 있던 이 전설적인 비평가는, 퇴직 뒤에도 서평 외의 다른 분야에 관한 좀 더 긴 글을 쓰고 싶다고 하니... 다른 분야에선 또 얼마나 무시무시한 비평으로 해당 분야 종사자들을 몸살나게 만들지 참으로 기대된다.

주례사 비평으로 점철된 우리 현실에서 참 부러운 인물이 아닐 수 없다...

chapter 52 - <덩케르크> 글 쓰는 마음

2012년이었던가... <인터스텔라>와 <그래비티>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장르로 개봉해서 여러모로 비교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인터스텔라>도 물론 명작이었지만 <그래비티>가 워낙 압도적인 걸작이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조용히 <그래비티>의 손을 들어줬었다.

이번에 드디어 놀란 감독이 <그래비티>에 맞먹는 걸작을 내놓은 것 같다. 다른 것 다 제거하고, 오로지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절박함에 집중한 작품. 그런데 이게 실화에 바탕을 둔 내용이니... 모골이 송연해짐과 동시에 숙연해지고, 살아남는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위대한 승리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생존에 대한 위대한 찬가가 이렇게 탄생했다. 늘 그렇듯 픽션은 현실을 이기지 못함을 보여주는 놀라운 작품이다.

투항을 권고하는 삐라가 날아 내려오는 아무도 없는 시가지의 첫 장면에서 느닷없이 가해지는 총격으로 시작하여, 달리고 헤엄치고, 발버둥치고, 울부짖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총체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늘 그렇듯, 전사자 xx명 중 한 명으로 집계되고 말 그런 최후를 맞이하는 인간들이 도처에서 쓰러진다. 주인공은 절대 죽지 않아! 하는 빤한 생각마저도 스쳐갈 겨를 없이... 이런 게 바로 전쟁이라는, 전장의 한복판이라는 것이겠지. 내가 그 한복판에 있다 빠져 나온 것처럼 내내 벌벌 떨었다... 정말이지 전쟁이란...

<인셉션>에서 부렸던 시간의 마법을 놀란은 다시 한번 선보인다. 림보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는, 결과적으로 전체적으로 흐른 시간은 더 길어지는, 그 때의 마법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덩케르크 탈출 작전을 다루는 아주 적절한 극작법이었다.

잔교에서의 1주일, 선박에서의 하루, 전투기에서의 1시간...

어떻게든 빠져 나가려 발버둥치는 잔교에서의 1주일은 왜 그렇게 아득하게 길게만 느껴지던지, 구출하러 달려가는 선박의 하루 행적은 왜 그리도 느리게만 느껴지는지... 그리고 공중에서 이들을 엄호해야 할 전투기의 1시간은 급박하지만 왜 이렇게 뜻대로 안 풀리는지... 모든 시간이 안타까움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인셉션>에서 선보였던 시간의 마법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긴장감을 탄생시킨다.

왜 죽어가는 사람 모두를 살리지 못하는가?

철없던 시절에 이런 생각을 하며 안타까움에 몸부림쳤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답이라고 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 납득할만한 대답을 알고 있다.

한 명이라도 더 살리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남는 모습이 바로 우리를 움직이는 거라고.

그런 집념으로 그 많은 민간 선박이 덩케르크 해변을 뒤덮었던 것이리라. 모두 다 구할 순 없지만, 모두 다 잃는 것보단 낫다는 집념으로.

그런 사명감이 있었기에 전투기 조종사는 임무를 마치고 조용히 인적 없는 곳에 불시착하여 적군의 포로가 되는 것을 택했으리라.

내가 쓰는 작품은 인간의 어두운 면모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강하고, 그것도 결국 나만의 색채기에 딱히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역시나 인간의 생존에 대한 위대한 찬가를 마주하게 되면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나와 전혀 다르지만 결국은 인간을 다루는 같은 작업이니까.

<덩케르크>는 그런 작품이다. 살아 돌아왔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라고 조용히 극찬해 주는...

chapter 51 - 동유럽 3개국 예술 기행이랄까... 글 쓰는 마음

체코, 헝가리, 오스트리아 3개국을 다녀왔다.

뭐 남들 다 가는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인 코스를 밟다 온 셈이긴 한데, 그래도 모처럼 마음 편하게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주변 환경과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음미하는 시간을 원없이 즐기다 왔다. 굳이 규정 짓자면 정원 산책 기행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정원이 많은 고도에 갔으니, 게다가 계절도 계절인 만큼 녹음이 우거지고 온갖 꽃이 만발한 정원 한가운데, 때로는 분수 곁에서 때로는 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기만 해도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심지어 호텔 바로 옆에도 작은 공원이 있었다. 나무 몇 그루만 있어도 새들이 모여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정말 실컷 듣고 왔다.

건물이 낮으니 서울과 비슷한 나무들인데도 더 울창하게 느껴졌다. 그러니 거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거리 곳곳에 벤치도 참 많이 있었다. 지나가다가 얼마든지 앉아 쉬었다 가라는 배려. 거리에 머물러 있고 싶어지게 만드는 이유들이었다.

전형적인 코스긴 했지만 박물관을 꽤 즐기는 편이라 중요한 박물관은 꼭 들렀고, 들르는 박물관마다 도록은 꼭 챙기다 보니... 대책없이 두꺼운 책들을 한 권 두 권 사 모은 결과, 무려 열 두 권이나 짊어지고 오게 됐다. 정말 무거워서 돌아가시는 줄... 그나마 이동이 3번뿐이었으니 망정이지...

책이 열 두 권이나 되게 된 이유는 역시나 지름신의 작용이 있었다.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150유로 짜리 타셴사 도감을 무려 15유로, 90 퍼센트 할인해서 판매하고 있는 걸 보고 흥분한 나머지... 두 권이나 샀다. 700페이지 짜리... 믿기지 않는 할인율에 검색까지 해 봤더니 틀림없는 150유로 짜리 책... 이런 기회를 놓친다면 바보가 따로 없겠지...

게다가 가는 곳마다 현지 작가의 원어책을 한 권씩은 사야겠다는 계획까지 세우고 간 바람에... 체코에서는 카를 차펙의 <R. U. R.>을 샀다. 로봇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선보인 그 책. 그리고 헝가리에서는 산도르 마라이의 책 두 권을 샀다. 사실은 카프카의 고향 프라하에서 카프카 책을 사고 싶었지만, 이미 프라하에는 독일어를 쓰는 사람이 살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는지 체코어 판 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빈에서 사려고 시도했지만 <변신>밖에 없어서... 내가 사고 싶었던 건 <성>이었기 때문에 포기했다. 그 밖에 어릴 때 재미있게 읽었던 독일 동화 몇 권을 사고 싶었지만... 이제는 현지인들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된 책일 뿐이었다. 그래서 독일어 서적은 입수 실패...

벼룩시장이나 기념품 가게에서 산 소품들을 제외하고는 정말 책만 사 온 여행인 셈이다. 사실은 더 짊어지고 오지 못한 책이 워낙 많아서 아쉽기만 하다... 하아...

프라하 카프카 기념관에서는 어머니께 보여드리기엔 너무 우울한 내용이라(요절한 카프카도 그렇고 일가족이 전부 나치 수용소에서 희생되었으니...) 건너뛰고 기념품만 샀다. 가장 카프카를 잘 나타낼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둘러보다가, 사진은 전부 너무 어설펐고, 그래서 고른 게 카프카 서명이 담긴 마그넷. 마음에 꼭 드는 기념품이었다.

베네치아 무라노 유리 공예의 자랑인 아쿠아리움, 즉 물고기가 담긴 어항이나 수족관 제품을 꼭 갖고 싶었지만 너무 비싸서 손가락만 빨고 있다가 우연히 빈 벼룩시장에서 하나 발견해서 9유로에 득템했다. 베네치아 제품은 아니었지만 아쿠아리움 자체를 갖고 싶었기 때문에 눈에 띄자마자 집어들었다. 금붕어 여섯 마리가 헤엄치고 있는 한 손에 잡히는 깜찍한 아쿠아리움.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실은 유리 공예로 유명한 프라하에서 뭘 살까 고민하다가 산 문진도 두 개나 있다. 게다가 빈 시내에서 정말 물방울을 떨어뜨려 놓은 것 같은 모양의 문진도 하나 샀고... 내가 암만 책을 좋아하지만 문진만 세 개를 사 오다니... 하아...

쇼핑한 아이템 무게에 치어 지치고, 때로는 일정이 계획대로 안 풀려 또 다시 지치고, 모든 여행이 으레 그렇듯 예측 불허 투성이 여행이었지만, 나름 하고 싶었던 걸 하다 온 여행이라 벌써부터 그립기만 하다...

chapter 50 - 최근 본, 창작에 큰 자극이 되어 준 영화 세 편 글 쓰는 마음

좀 지나긴 했지만 연달아서 영화 세 편을 보았다.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이렇게 한꺼번에 공개되는 것도 참 오랜만인 거 같다. 세 편 모두 뛰어난 작품이었지만 특히 시나리오가 뛰어났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좋은 자극을 받았다.

<텔마와 루이스>
세상에 나온지 26년 정도 밖에 안 됐지만 나오자마자 일찌감치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페미니즘 영화의 대명사와도 같은 작품이지만 시나리오 작가가 언급했듯이 여성에 국한되지 않은, 세상 모든 약자들을 위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다시 한 번 보면서 얼마나 시나리오가 매끄럽게 집필되었는지 새삼 감탄했다. 모든 사건은 대단원에 이르기까지 물 흐르듯 흘러가며, 그 과정에서 두 주인공의 캐릭터가 극적으로 변하는 모습도 입체적으로 묘사되었다. 두 사람 모두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지만 캐릭터의 매력으로 따지면 역시 텔마가 더 돋보인다. 남편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던 평범한 주부에서 극한에 몰린 끝에 능동적으로 거듭나는, 가히 <에일리언>의 리플리에 버금가는 강렬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렇다고 루이스 캐릭터가 매력이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은 두 캐릭터 모두 너무 훌륭해서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이 정도로 입체적인 인물 묘사라니, 게다가 뛰어난 극적 전개하며 강한 주제의식, 아카데미 시나리오 상을 탈 수 밖에 없는 작품이다. 요즘 말로 작감배가 모두 뛰어나면 이런 작품이 튀어나오게 된다.

두 주인공의 입을 빌어 줄곧 주제의식을 말하지만, 워낙 캐릭터에 완전히 녹여 내어 대사를 구사하는 덕에 전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게 바로 극작법의 정수라는 것이다.

인상적인 대사가 수두룩하지만 기억 나는 대로 적어 보자면,

<난 좀 미친 거 같아>
<넌 원래 미쳐 있었어, 텔마. 지금이 그걸 표현할 수 있게 된 유일한 기회일 뿐이지>

<루이스, 깨어 있니?>
<눈을 뜨고 있냐는 뜻이라면, 맞아>
<난 지금, 너무 분명하게 깨어 있어. 지금까지 이렇게 확실하게 깨어 있었던 적이 없었던 거 같아.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여>

(남편이 다정하게 전화 받자 마자 끊으며) <(우리가 경찰에 쫓긴다는 사실을 남편이) 벌써 알고 있어>

(경찰의 추격으로 막다른 절벽에 몰리게 되자) <우리 절대로 잡히지 말자. 계속 달려>
<뭐?>
<계속 달리라고>
<확실한 거지?>
<응>

<그 놈이 죽은 건 하나도 안타깝지 않아. 내가 아니라 네가 그 놈을 죽인 게 아쉬울 뿐이지>

<만약 경찰에게 갔다면 네 말대로 아무도 내 말을 안 믿었을 거고, 아마 난 지금 보다 더 망가졌을 거야. 지금은 차라리 재미있기라도 하잖아?>

이런 식으로 명대사가 줄줄이 나온다. 완전히 명대사의 향연... 아, 또 보고 싶다... 정말 멋진 영화였어...



<토니 에드만>
창작하는 사람의 로망 중 하나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는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다. 예측할 수 있다는 건 기존 작품을 통해 학습한 결과 유추할 수 있는 대로 전개가 흘러간다는 뜻이고, 창작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이것만큼 싫은 일도 없다. 그러나 좋든 싫든, 아무리 머리를 써도 어느 정도는 예측대로 전개해 나갈 수 밖에 없는 게 창작자의 고민이기도 하다.

그런데 단 한 순간도 예측할 수 없는 작품을 드디어 만났다. 정말 어떻게 이런 식으로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지,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이 작품을 보는 동안 예측이란 완전히 무용지물이 된다.

괴짜 아버지와 일중독에 빠진 딸의 얘기라고 한 줄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게, 정말이지 나머지는 직접 보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전개를 과시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단 한 번도 우리가 예측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그럼에도 전부 납득이 간다. 이렇게 말하면 도대체 뭔 소리야? 하겠지만 실제로 그렇다... 이건 뭐 시나리오도 뛰어나지만, 역시나 작감배가 모두 제대로 잘 어우러졌기 때문이지만...

정말 배우들은 모든 걸 버린 연기를 보여준다. 머리로 납득 가지 않는 장면이 한 두 장면이 아니었을 텐데, 감독을 믿고 따르며 훌륭한 연기를 펼친다. 이것도 보고 나와서 든 생각이지 보는 동안에는 어떻게 해, 어떻게 해,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보게 된다.

멋도 모르고(아니면 적어도 남자는 알면서도 데리고 왔을지도) 소위 말하는 평범한 예술 영화인 줄 알고 보러 온 연인이 있었는데(대화 내용으로 유추해 보건대), 두 사람이 어디까지 진도가 나간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연인끼리 보기엔 상당히 민망한 장면이 한 장면 있었다... 저 두 사람이 영화를 보고 저 장면을 한 번 따라해 보자고 하지는 않을까 심히 궁금해지던... 한국도 진짜 많이 개방되었구나 좀 놀랐다. 저런 장면이 삭제되지 않고 그대로 나올 줄이야...

본 사람들한테 힌트 주자면, 그 웃긴 장면 아니에요... 케이크가 나오는 그 장면이에요...

뭐 아무튼 진짜 가장 많이 자극 받은 작품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을까? 좀 더 나를 벗어 던져야 가능하겠구나, 깨달음을 얻은...



<문라이트>
작년에 공개된 뒤 상이란 상은 차곡차곡 긁어 모으고 있는 화제의 작품이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아카데미 시상식 해프닝도 있었지만 그건 사실 뭐 별로 관심 없었고... 아무튼 기대를 안고 보러 갔다.

역시나 뛰어난 시나리오를 자랑하는 작품이다. 전혀 전형적이지 않은 인물들에, 그 인물들이 처한 아이러니한 상황에, 가슴 아픈 인물들의 선택에... 뛰어난 시나리오를 배신하지 않는 뛰어난 연출과 연기까지, 가히 작년 공개된 작품 중 최고작 중의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후안이라는 캐릭터. 연기도 연기지만 캐릭터 자체도 뛰어나다. 어린 샤이론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면서도 샤이론의 어머니에게 마약을 파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괴로워 하는 모습이 가슴 아팠다. 후안은 샤이론의 인생에 있어 빛이었을까 어둠이었을까? 이런 질문이 가능한, 굉장히 다층적인 작품이다.

샤이론을 사랑하면서도 마약 중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샤이론의 어머니도 가슴 아프고, 서로의 마음을 교환하고 난 바로 그 다음날 샤이론을 폭행해야 했던 케빈의 그 치기어린 선택까지... 그러나 흑인 저소득층에 만연한 치부를 보여주려는 작품이 아니어서 좋았다. 이들이 겪는 고통과 아이러니는 그 어떤 곳에서도 일맥상통하는 그런 것들이다.

세상에, 두 무뚝뚝한 남자가 이런 성적 긴장감을 보여줄 수 있다니... 이전 포스팅에서 <유령 작가>에 등장했던 성적 긴장감 묘사에 감탄한 적도 있었지만 이 작품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움에서 질투를 거쳐 서로의 감정 확인까지, 절제된 대사와 표정만으로 그 모든 감정을 연기한 두 배우를 정말 격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감정의 흐름을 이끌어내는 바바라 루이스의 명곡 <Hello, stranger> 선곡까지... 덕분에 주구장창 유튜브로 이 장면을 반복 재생하고 있다...

거친 세상 묘사를 이렇게 뛰어난 방식으로 해내는 영화들을 보면, 거들먹거리며 폭력의 세계를 묘사하며 간지를 부여하는 영화들에 역겨움을 느끼게 된다. 거친 세상을 살아내는 인물의 고통과 아이러니에 좀 주목해 보라는 말을 해 주고 싶다. 바로 그런 게 명작과 삼류 작품의 차이점이겠지...

chapter 49 번역, 어디까지 가 봤니? 글 쓰는 마음

지난 번에도 번역에 대한 얘기를 했었지만, 애교가 철철 넘치는 번역을 우연히 발견해서 링크를 단다.

나는 이모지 족이 아니기 때문에 도무지 해석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가능한 번역이라는 건 알겠다...

멜빌의 <모비 딕>을 이모지로 완역했다고 한다...


처음 본 순간 느낌은 그야말로 대략 난감... 그 유명한 첫 문장인 Call me Ishmael 이 왜 저렇게 번역되는지 전혀 모르겠다. 아니 하나는 알겠다... call이란 단어의 번역 ㅎㅎ 쭉쭉 훑어보니 뭐 알아먹겠는 번역도 있지만 대부분 ???의 연속이다...

번역자의 원작 훼손에 대해 지난번엔 신랄하게 적었었지만... 이번엔 장난이라 하기엔 너무 방대한 분량의 작업을 완료한 근성을 보자니 이걸 웃어줘야 좋을지 아니면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이모지를 잔뜩 보고 난 끝이라 뭐라 길게 할 말도 생각나지 않고...

책으로도 어엿이 출간된 작품이니 도서 밸리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직접 방문해서 확인해 보시길... 덕중지덕은 양덕이란 말은 절대진리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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